백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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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의 거미학자 여강 백갑용 박사의 생애와 업적

김주필(Joo Pil Kim). (2015). 한국의 거미학자 여강 백갑용(如岡 白甲鏞) 박사의 생애와 업적. 한국거미, 31(2), 3-29.

2.1940년대의 어떤 이력서

해방 이후의 이력서인데, 구성명을 기록하게 되어 있음. 십여년전에 동사무소에 가서 나의 조상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니 할아버지 기준의 호적초본을 주었다. 그 서류에서 조상의 창씨개명 사항을 확인했기에 구성명에서 보이는 할아버지의 창씨가 낯설지는 않았다. 이력서의 끝이 “병으로 인해서 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도 쓰고 글도 쓰고 있다“로 마무리 되고 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13년간의 투병을 마치고 1959년에서야 다시 “소생” 하였다.

3.김덕생 할머니

별로 앞이 보이지 않던 시절 할아버지와 가족을 생존하게 만든것은 우리 할머니 김덕생 여사의 억척과 희생 덕이다. http://iam1969.com/2024/10/김덕생

4. 나의 아버지

금전출납부에 정리된 할아버지의 표본목록표 . 살펴보니 1956년도에 수집된 표본의 대다수는 나의 아버지 백의인 (1942-2000)에 의해 수집되었다. 생존하기 위해 연구를 해야하고 당신은 병환 중이니 표본채집은 아버지나 큰고모의 몫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가 10여년간 병상에 누워 계실때 모든 표본의 수집은 주로 아버지 몫이었다 이야기 들었다. 저 금전출납부를 보면 주린배에 표충망 하나 들고 산으로 들로 다녔을 어린 아버지 보는 것 같다.

5.수창초등학교 13회

국립대학교 사범대학교 학장이 이인성!과 이쾌대!!!와 같이 이름 올린것은 시대의 덕이 있는 것 같지만, 할아버지 수창초등학교 13회 동기로 이인성, 이쾌대가 있다.

6.변함없던 일상

중앙일보 1972년 1월11일(http://news.joins.com/article/1311148)

거미박사|경북대 사대 생물학과 백갑용 교수

거미 연구에 바친 인생 40년. 하고많은 생물 가운데 하필이면 거미 연구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지만 거미의 성미를 닮아서일까, 「거미박사」 백갑용 교수(57·경북대 사대 생물과)의 인생은 끈질긴 집념으로 일관했다. 12년 동안이나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의지로 병마를 이겼고 5만여 마리의 거미를 잡아 분류중이다.
경북 대구시 산격동 방학을 맞아 조용한 경북대「캠퍼스」. 상오10시쯤「스쿨·버스」에서 내린 백 교수는 교수 휴게실에서 차 한잔을 들고 이내 연구실로 향한다. 6평 남짓한 연구실에는 실험대로 쓰이는 책상2개·실체 현미경·「핀세트」·가는 붓·표본 거미가 들어있는 「페니실린」병 1천여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40여년간 연구 끝에 5만 마리 채집 분류|항일 동맹 휴학하다 퇴학당한 후부터 시작|투병 12년…의지로 이기고|거미처럼 끈질기게 사는 법 배워야

하등 동물을 분류하는 일 만큼이나 고되고 지리한 연구가 또 있을까. 어울리지 않게 6척 거구의 백 교수는「스테이지」위에 표본 거미를 올려놓고 접안「렌즈」를 들여다보면서 가는 붓끝으로 신체각부를 헤친다. 홑눈이 몇 개·그 간격은 얼마인가·두흉부의 형태, 다리의 길이, 다리에 붙은 솜털의 특징과 길이, 생식기의 특징, 거미줄을 뿜어내는 방적선의 성분 등등….
몸집의 크기에 나름 없이 관찰할 일이 많다. 게다가 하나 하나를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야한다.
「거미박사」의 이마에는 어느 덧 땀방울이 맺힌다.
한 마리의 거미를 완전히 조사·분류하려면 보통 1주일이나 걸린다는 것. 표본실의 거미5만여 마리 가운데 2만여 마리는 이미 분류가 끝나 2백 종으로 정리됐다. 나머지를 분류하는 것이 백 교수 여생의 과제. 백 교수는 지난64년「제주도 산 다족류에 관한 연구」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백 교수는 이 연구를 위해 해마다 여름 방학동안 제주도에서 지낸다.
새벽 5시 동이 틀 무렵 조수 3명과 함께 한라산 기슭을 올라 채집 망으로 풀 섶을 훑는다. 집에서만 사는 놈·땅 구멍에 사는 문서거미·물 속에 집을 짓는 불 거미·집을 짓지 않는 파리거미 등등 거미의 습성에 따라 살만한 곳을 더듬는다. 하루평균 1백여 마리의 각종거미를 잡아「알콜」이 든 채집 병에 넣는다. 이렇게 3년 동안 채집여행에서 1만여 마리를 잡았다.
「거미박사」의 연구실은 대학에서 가장 늦게 불이 꺼진다. 채집한 거미를 분류하는 일을 시작하기 때문. 상오 10시에 책상에 앉으면 자리를 뜨는 일이 없다. 조수 송민자씨(31·전임강사)가 하오2시가 되도록 점심을 들지 않는 박사를 위해 「라면」을 끓인다
한참 연구에 몰두하면 조수의 배고픈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밤11쯤 송씨가 「메모지」에『박사님, 배가 고파요』라고 적어 현미경 옆에 살짝 놓는다.
지구상의 거미 종류는 무려 7만여 종. 전문가에 의해 종(계)별로 분류된 것은 극히 일부분.
일본에서 8백여 종이 밝혀졌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2백여 종만이 분류됐다.
그나마 백 교수 혼자서 40년간 노력한 결정이다.
백 교수는 친구들로부터『거미를 들여다보면 거미줄이 흘러나오듯 돈이라도 생기느냐』는 농담을 곧잘 받는다고 했다.
그때마다 「거미박사」는『거미를 배우라』고 대답하곤 한다.
거미는 배타적인 곤충. 집단 서식을 싫어해 교미가 끝나면 암놈은 수놈을 잡아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독부다. 이점이 얄밉기는 하지만, 한편 수놈으로 보면 자기 몸을 잡아먹히면서까지 암놈을 사랑한다는 역설도 된다.
거미의 끈질기게 참을 줄 아는 성미는 본받을 만하다는 것.
저녁놀이 지면 거미는 먹이를 위해 집을 만든다. 끈끈한 동물 섬유로 방사선 그물을 치자면 서른번 가량은 오르내린다.

보통 한 채의 그물 집을 짓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가량. 거미는 으슥한 곳에 몸을 도사리고 먹이가 걸릴 때까지 기다린다. 먹고 남은 먹이는 거미줄로 꽁꽁 감아 저장한다. 비오고 바람 부는 날을 위해서다.
「거미박사」의 일생은 마치 그가 연구하는 거미처럼 끈질겼다. 대구고보 4학년 때 항일동맹 휴학을 선동한 죄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17세 소년은 나비 채를 들고 산으로 들로 헤매면서 곤충 채집과 거미를 잡으며 울분을 씻었다고 했다.
26세 때 일본「미와자끼」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거미 한 가지만을 파고들었다. 해방될 때 2만여 점의 표본을 채집했으나 연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폐결핵으로 쓰러졌다.
12년 동안의 투병생활. 「거미박사」는 산다는 의미를 생각했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거미연구를 끝장내고 말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고 했다.
27세 때 중매 결혼한 부인 김덕생씨(55)는 그가 투병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삯바느질·참기름 행상 등으로 끼니를 이었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투병 생활에서 회복, 본격적인 「거미」연구를 하게된 그는『덤으로 얻은 삶』을 거미채집에 바쳐왔다고. <대구=김재혁 기자>

7.인생! Once, and only once, and for one only

理學博士 如岡 白甲鏞
선생님은 1914년 12월 23일 白英基公과 朴福伊 女史의 장남으로 태어나시고 1996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나시니 대구시 중구 서야동 20번지가 그 출생지요 돌아가신 곳이다. 雲田 金德生(데레사) 女史와의 사이에 2男 2女를 두셨다. 대구고등보통학교와 미야자기(宮崎)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신 후 수원농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계명대학교 이공대학 교수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셨다. 절지동물에 속하는 거미류 연구에 평생을 바쳐서 거미의 분포경계선인 하찌스카-라인 설정 및 다수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을 남기셨다. 세계적인 학자로서도 명성이 높았고 경상북도 문화상(1972년), 국민훈장 동백장(1972년), 하은생물학상(1979년)을 수상하셨다. 선생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가르치심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뜻을 이 작은 돌에 새긴다. 2001년 4월 제자 徐普根 근선

손자 생일날 돌아 가시는 바람에 손자에게 절대 당신 돌아가신 날 잊어버리지 못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 손자도 이런 기록들 (괜히) 남겨보는 나이가 되었다. 사랑이건, 인생이건, 뭐건 한번, 단 한번, 한 사람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