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산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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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월간 [산]에 연재된 한국 등산사 초록 [대구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출처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2024/10/27)

#한라산학술조사등반

36명이 1958년 8월4일부터 13일까지 9박10일동안 치룬 이 행사는 많은 교훈과 놀라운 업적도 남긴 행사로 기록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장 좋다는 직장, 은행이나 교직으로 진출하면 3,000환 정도의 월급을 받던 시절인데, 참가회비는 한 달치 월급보다 더 컸다.
예산총액을 650,000환으로 책정했는데 막상 행사를 시작할 때는 400,000환만이 확보되었다. 예산에서 1/3이 줄어든 돈으로 행사를 진행한 집행부의 고충도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돈을 얼마나 아껴 썼는지 ‘수전노’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고 ‘버릇없는 놈’이라는 비난도 수없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260환의 적자만을 남겼다는 실토다. 기금을 확보해야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교훈을 얻었다.
기획된 학술조사분야는 방대했지만 결과는 기획과는 크게 상이했다는 것을 반성했다. 생물 분야는 참가인원도 많았지만 학계에 큰 업적도 남겼다. #백갑용 교수(경북대 사대)는 김용기 이희종 #백의인 이 한라산에서 처음으로 채집한 거미에다가 백(Paik)이라는 자신의 성(姓)이 들어간 학명을 부여하고 학계에다가 발표했다. 이 거미가 ‘제주외줄거미’다. 김용기는 ‘제주도에서 채집한 곤충목록’이라는 소중한 학술자료를 회지 ‘산악’에다가 남겨놓고 있다.

소백산학술조사등반

1959년 8월15일 새벽 대구를 떠난 소백산 등반대는 오후 늦게야 긴 시간 버스 속에서 시달린 끝에 순흥 소수서원에 도착했다. 소수서원에서 강행군을 시작한 등반대 26명은 해거름에 초암사 입구 계곡에다가 첫 막영지를 설치했다. 그곳은 지금 초암사 입구 갈림길의 큰 주차장이 되어 있다.
최영호 부회장의 훈시가 있었고, 김기문 작사, 김진균 작곡의 회가 ‘산악의 노래’가 처음으로 불려졌다. 처음으로 부른 우리들의 노래, 경북학생산악연맹 회가 ‘산악의 노래’. 참으로 감동적인 밤이었다. 작사자와 작곡가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으니 그 감동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백두산 한라산의 정기를 받아 / 젊은 핏줄 타고 흐르는 의욕 / 등정할 생각 잊고 바라만 보랴 / 큰 뜻 이루고저 산을 오른다 // (후렴) 화랑의 옛 기상을 다시 찾으려 / 우리는 젊은이의 앞장 선 무리 // 삼천리 뻗어내린 금수강산의 / 솟은 준봉 아래 이뤄진 역사 / 온핏줄 구비구비 뛰는 기백이 / 아아(峨峨) 산정에서 용솟음 친다 // 오늘도 푸른 산맥 타고 오르면 / 갓 깬 산노루도 함께 뛰누나 / 우리들 뜻을 지닌 청년이고져 / 어둔 내 강산에 횃불을 든다.’
초암막영지에서 국망봉으로, 그리고 비로봉, 연화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타는 것이 계획된 코스였다. 국망봉에 올라 근처 암장으로 전 대원이 집합했다. 배석규의 하강(압자일렌) 시범이 있었다. 대구 산악운동사에서 자일을 처음 사용한 기록이다. 시범을 끝낸 배석규는 호명을 시작했다. 서해창, 김기문, 박재곤의 순서였다. 그러고는 자신이 했던 대로 하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날 사용했던 자일은 마니라삼으로 엮은 자일이었다. 그 시간 중학생 대원이었던 #백의인 (현 효성카톨릭대학 교수)은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국망봉 근처에서 혼자 땅바닥에 쓰러지다시피 자버렸다. 얼마나 고단했던지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는 곳에서 무서움도 잊고 성인대원들이 깨어 줄 때까지 자버린 그 낮잠의 맛이야말로 천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교산악부활동

중학교 3학년부터 혹은 고등학교 1학년으로서 개인적으로 경북학생산악연맹에 가입하여 산악활동을 해오던 #백의인(대륜고), 오완섭, 우석훈(본래 이름 원기), 강영덕(이상 계성고), 강길영(경북고), 김종욱(대구고) 등이 각기 소속된 학교에서 산악부를 창립하고 경쟁적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연맹에서는 이들을 함께 모아 1959년 8월에 준회원부의 활동으로 각급 학교 지도교사와 함께 소백산 학술조사등반을 마치고, 그해 10월23일에서 25일까지 제1회 전국 60km 극복 등행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각급 학교의 산악부 조직에 기폭제가 되었다.

하계산간학교

4.19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북학산련도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6월6일 청구대학 강당에서 열린 제4회 정기총회가 바로 그 전환점이 되었다. 창립에서 3년동안 이 연맹을 이끌어온 서해창, 김기문 쌍두마차가 이선으로 물러앉고, 박재곤(대표), 김종율(기술), 양희재(학술)의 새로운 진용이 집행부를 맡게 됐다.
이효상 회장, 하영수 부회장을 재추대하고, 박기병(육군 소장, 제5관구 사령관), #백갑용(경북대 사대 생물과 교수) 두 분을 새로운 부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 회장단은 대구 산악계의 큰 병풍 역할과 활력의 공급원으로 크게 기여했다.
6월6일 총회 직후 새 집행부가 당장 기획해야 할 과제는 여름행사였다. 3년동안 해오던 기본적인 여름행사인 학술조사등반에서 진일보한 행사로 기획한 것이 하계산간학교였다. ‘학교’라는 명칭과 교과과정이나 학교체제로 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등산학교로 기록하는 데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설악산천불동동계등반

그 해 겨울 12월24일부터 1963년 1월8일까지 경북산악회는 설악산 천불동 동계 등반에 나섰다.
“우리는 이 땅 산악인의 도표요 기수이다. 끓는 조국애로서 조국의 산천을 다듬고 연구할 것이며, 역사를 이끌어 온 미지에로 향한 힘으로 세계의 산을 찾아내어 인류사회에 봉사할 것이다. 쉼없는 우리의 노력은 마침내 범국민 운동화에 이를 것이며, 세계의 산은 우리들의 힘으로 그 길이 열려질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우리들은 오늘의 출발이 곧 완성에 이르는 날임을 굳게 결의하는 바이다.”(경북산악회 회칙 전문에서)
설악산으로 떠나는 대원들에게 하영수 회장은 이런 거창한 내용과 결의에 찬 어조로 대원들을 격려하며 반드시 해외원정을 달성하겠다고 다짐했다. 해외원정을 꿈꾸고 있던 우리들에게는 이 한 마디에 새로운 힘을 얻었다.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데 15일 계획을 세운 서해창 대장과 대원 12명의 각오는 심각했다.
이것이 대구 지역에서 설악산을 동계에 시도한 최초의 등반으로 기억된다. 대구향교 옆 대장간에서 온갖 방법으로 설명해서 만든 네발짜리 아이젠, 태백산 등반도중 화전민에게서 구한 설피와 두 개의 피켈이 자랑스럽고 소중한 장비의 모두였다. 그런 시절 얼어붙은 폭포를 등반한다는 것에 불안과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1963년적설기덕유산등반 #김종욱 #박상열 #임문현

경북학산련의 동계 덕유산 등반은 계주식 팀과 극지법 팀으로 나누어 실시했다. 김종욱을 리더로 한 박상열 최희곤 등 5명의 계주식 팀은 금릉군(현 김천시)의 대덕산에서 시작해 덕유산에 이르고, 임문현을 리더로 한 극지법 팀은 영각사에 BC를 두고 극지법으로 등반해 덕유산 정상에서 두 팀이 만나 함께 하산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입산 이틀째부터 엄청난 강풍이 불어닥쳐 극지법 팀이 영각사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계주식 팀은 등반을 강행해 덕유산에 도착했다. 그동안 두 팀간에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아 극지법 팀과 대구 선배들은 계주식 팀이 조난당한 것으로 추정, 구조대를 편성하고 군 헬기로 수색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정상에서 하루를 더 기다린 계주식 팀은 군부대 통신대원들의 협조로 2군사령부를 거쳐 백갑용 부회장에게 전화가 연결되어 대구가 온통 난리가 난 것을 알았다. 급히 무주구천동으로 하산하여 대원들 주머니를 몽땅 털어 김천까지 겨우 나왔다. 다행히 김천역에서 친구를 만나 무사히 대구까지 올 수 있었다. 필자는 다음날 새벽 4시 버스로 영각사로 달려갔다. 하루 꼬박 걸려 밤중에 도착한 나는 선배들에 둘러싸여 눈물어린 시간을 보냈다.

팔공산악제

1930년대부터 우리 나라에 산악운동이 시작되면서 지도자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개척자적인 활동을 해 왔거나 산악운동의 발전에 끼친 공적이 현저하여 그 업적이 탁월한 자는 물론, 특히 후배 양성에 공적이 많은 자에게 시상함으로써 그분들의 업적도 기리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팔공산악상을 제정했다. 역대 수상자는 이효상(1호), 이은상, 배석규, 홍종인, 이숭녕, 변완철, 김정태, 이기섭, 김영도, 안광옥, 유홍렬, 이원락, 윤현필, 김종율, 권효섭, 송희원, 박우진, 박상열, 최영호, 김기문, #백갑용, 양인석씨가 제10회 산악제까지 수상하신 분들이다.

경북대학교산악회

경북대학교 산악회는 거슬러 올라가면 1956년 김기문의 사범 대학 산악부 창립이 그 시초다. 이어서 문리대, 법대, 의대, 농대 순으로 산악부가 창립되고, 경북학산련의 산파역은 물론 조직의 핵심인 대표상임위원을 초대 서해창, 박재곤, 김종율, 임문현, 김종욱, 김태화, 금창석, 손익성, 김특진과 70년대 정문구, 곽규열 등 이 대학 출신들이 맡았다.
60km 극복 등행대회는 물론 1962년 당시 혁명정부가 계획한 특수체육 등산대회에 고 #백의인, 김종욱, 임문현, 이정두가 출전하여 우승했고, 대구 근교의 암벽 코스 개척과 동․하계 장기 등반을 꾸준히 계속하여 오던 중 1968년 김태화, 금창석, 손익성, 문철 등이 주축이 되어 5개 단과대학 산악부를 통합하여 경북대학교 산악회를 창립했다.


#Linked Lives

할아버지와 아버지 당신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이니 버리지 말고 자식들이 잘 보관하면 좋겠다는 뜻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책꽂이 시계 뒤쪽 주변에는 당신들의 추억이 있는 책들을 보관해 놓았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서재에 있던 책 절반 이상을 폐지로 버리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들이 그 절반을 폐지로 버려도 여전히 먼지 앉은 책들은 말라 비틀어진채 언제일지 모를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대구 중구 서야동 여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출생지요 돌아가신 곳이고 수 많은 문자와 책들의 들의 안치소이다.


어제는 1961년 창간된 #경북학생산악연맹(KSAA:Kyung Puk Students Alpine Association)의 회지 <산악> 창간호를 시간 들여서 살펴보았다. <산악>은 우리나라 최초의산악전문지로 평가 받는다. “학생”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대학교를 중심으로 학생, 교수, 일반인, 연구자 등이 참여하는 조직이었다.
“경북학생산악연맹을 1956년에 발족한 이래 소백산, 지리산, 하라산, 성인봉, 운문산, 금오산, 팔공산 등의 등반(登攀)하계산간학교, 60km 극복등행경기, 삼일절기념봉화행사, 성유굴탐험, 산악전, 보고강연회 등 수 많은 행사를 하므로서 우리나라 산악활동에 금자탑을 쌓았을 뿐 아니라 이러한 행사가 있을 때 마다 반드시 학술조사반을 편성하여 인문, 사회, 지리, 역사, 생물 등 각 방면의 조사를 하여 학계에 이바지한바도 적지 않다. 즉 경북학생산악연맹은 단순한 스포츠로서 등행을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학술조사면까지 그 활동을 발전시키므로서 등반을 생산과 직결시켰던 것이다. 이점, 전국의 산악회의 활동에서 일즉이 보지 못한 오즉 우리 경북학생산악연맹만이 가진 자랑할 만한 특색이라고 생각한다.” (#백갑용, 1961)

창간호 목차를 보니 낯익은 이름들이 있다. 중학생으로 대학생들 산간학교에 따라가서 활동했던 소감을 적은 아버지의 글(일기), 할아버지가 쓰신 [제주도의 다족류상과 제주외줄거미에 대하여], 어릴때 아버지 따라 산에 가면 ‘종규 왔나’, ‘할아버지 잘 계시나’ 하고 안부 여쭤보시던 임문현, 김종욱(사대생물교육과 60학번) 아저씨의 글도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명절이 되면 항상 집에 찾아와서 할아버지 뵙고 가시던 김용기 교장선생님의 글도 있다. 60년전 선배들이 걸었던 길이 참 귀하게 보인다. 특별한 일 없이 보여도 안치소에 사는 후손은 명절이 되면 가끔 바쁘다.

아버지 글을 아래 옮겨 적는다.


산일기
소백잡기 -단기4290년 8월-

백의인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다. 꼬마라는 명칭을 받고 대학생들을 따라 산에 오르자니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뻐스를 열두시간 계속해서 타기는 나고 처음이었다. 초암근처의 계곡을 지날때는 물이 많아 서해창 선생께 업혀 건너기가 세번이나 되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뛰어야만 겨우 꽁무니에 따라갈수 있었다. 국망봉을 오르면서 부터 산에 억지로 따라온 것이 후회 되기도 하였다. 땀흘리기 대장인 선생이 나의 짐을 지고 올라가다 지치는 것을 보고도 모두들 [록 크라이밍]을 배우러 갔다.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는 곳이었지만 고단한짐에 무서움도 잊어버리고 땅바닥에 쓰러지다 싶이 자버렸다. 한시간이 넘어서야 대원들이 돌아와 나를 깨워주었다. 그 낮잡의 맛이야 말로 천금을 주고라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비로봉으로 향했다. 비로봉 근처에는 나무가 거의 없다. 물을 찾지 못하고 해는 지고 추위는 닥쳤다. 대원들은 신경질 환자로 돌변 했다. 계속해서 전진하자는 소장파와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자는 노장파의 대립이 일어났다. 물론 노장파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계속에서 물을 찾는 고, 배, 서, 김 여러 선생님들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요란했다. 조금후 [물이야]하는 소리가 울렸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으로 내려가 야영 준비를 했다. 이날 넌센스가 속출했다. 새벽녙에 우리 천막에서 [으악 -]소리와 함께 나의 침낭위에 무엇이 자빠지는 것 같았다.잠을 깨어 몸을 움직여 보니 요지부동이다. 옆에 있던 서선생님은 [뱀이야, 빼애엠]하시고는 전지를 찾았으나 서선생님이 켜놓은 체로 자버려서 전지약이 다 딸아버렸다. 옆천막의 이웅창선생님께 [전지 좀 빌려주시요]헸드니 이선생님 겁이 나셨는지 천막밖으로 손도 내놓지않고 전지를 밖으로 집어 던저떠려서 한참동안 찾느라고 고생을 했다.


전지를 비쳐보니 뱀은 자취도 없고 달빛에 비친 [쟈일]이었다. 일어난 사람은 모두 서선생을 놀려대자 [그 전날 본 빨간 살모사가 꿈에 나타났드라]고 변명했다. 또 [라이카]사진기 두대를 가진 김씨는 공비가 나타난 줄 알고 사진기부터 [침낭]에 감추었다고 털어노아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계획서의 제3일째 야영지는 [희방사]였다. 막상 내려와보니 11시쯤에 도착되었다. 내일 아침에 여기에서 풍기로 내려가면 첫차를 못탄다는 노승의 말이다. 다 걸어가기가 싫었는데 이 말을 들으니 노승이 밉기도 했다. 풍기 근방 강에서 야영하기로 결정. 하산하는 도중 산악인으로서 행동시에는 금해야하는 술을 대장어른들이 마시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더. 또 화목 구입문제 때문에 B선생과 Y형 사이에 한참 말싸움이 터졌다. [나무는 각자 구입하여 밥을 하시요]라는 B선생의 말로 시작해서 술기가 약간 있던 Y형의 [우리는 돈이 한푼도 없고 오늘은 굶겠소]라는 대답이 오고갔다. 결국 화목은 공동구입품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거의가 부식이 떨어져서 그릇을 들고 된장을 얻어려 갔다. 나도 여기에 끼여서 갔다. 반 [콥펠]정도나 얻었다. 이것을 본 서선생님 [이 동네 인심 좋다]라고 한마디 했다. 다음날 대구로 오는 도중 안동에서 일행중 한사람이 없어졌다. 인원점호때 어떤 분이 [옆에 사는 누님집에 간다고 했는데 안왔읍니다]는 소리, 기다리다 결국 혼자두고 떠나왔다.
떠날때는 흐린 날씨였지만 우리가 산에 오르고 부터 도착할때까지 뭉게구름이 피는 하늘이었다.
(본연맹 사대 산악부)

단기 4290년(1957년), 중학교때 – 중학교 3학년부터 혹은 고등학교 1학년으로서 개인적으로 경북학생산악연맹에 가입하여 산악활동을 해오던 백의인(대륜고), 오완섭, 우석훈(본래 이름 원기), 강영덕(이상 계성고), 강길영(경북고), 김종욱(대구고) 등이 각기 소속된 학교에서 산악부를 창립하고 경쟁적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연맹에서는 이들을 함께 모아 1959년 8월에 준회원부의 활동으로 각급 학교 지도교사와 함께 소백산 학술조사등반을 마치고, 그해 10월23일에서 25일까지 제1회 전국 60km 극복 등행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각급 학교의 산악부 조직에 기폭제가 되었다 (김종욱, 한국등산사초록, 대구편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