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월출산
“워메, 월출산이네!” 갑자기 터진 어떤 아가씨의 탄성이었고, “워야 반가운거. 꿈에 보든 그대로시!” 설 쇠려고 고향을 찾아오는 다른 아가씨의 탄성이 이어졌다. 어엄니이…, 어엄니이….김명숙은 저 멀리 나타난 월출산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월출산을 보는 순간 꼭 어머니를 대한 것처럼 반가움과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육중한 바위들로 첩첩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신령스러운 월출산은 어머니 다음으로 꿈에 자주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조금 전에 한 아가씨가 외친 것을 보면 월출산을 꿈에 본 것은 자신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김명숙은 10년 만에 마주 대하는 월출산을 경건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월출산은 10년 세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예전과 다름없이 우람한 자태 그대로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우아하고 그윽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월출산을 보고 나자 버스 안은 더욱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영암에 다 왔고, 월출산을 감돌아가면 이내 강진이었던 것이다. 김명숙은 마음이 바빠 사람들을 따라 짐을 챙기고 싶기도 했지만 촌스럽게 굴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미리 챙겨야 할 만큼 짐이 많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10년 만에 만날 생각으로 김명숙은 가슴이 울렁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이 나고 있었다. 함께 돌아와야 하는데 나복녀의 식구들을 어찌 대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복녀와 함께 집을 떠날 때 품었던 꿈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꿈을 줄이고 바꾸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발공장 여공 신세로 나이만 10살이 불어나 있었다. 그러나 타관생활 10년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조정래 대하소설 한강에서)
무등산이 남으로 뻗쳐내려 솟아난 곳
조석필 글 & 심병우 사진, 월출산,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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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는 사람들의 감탄사보다 많다는 월출산의 그 많은 바위들은 다 어디서 났을까. 비밀은 폭 20킬로미터에 길이 100킬로미터쯤 된다는 소위 ‘영암-광주 화강암 저반(batholith)’에 있다. 월출산은 그 화강암 저반의 남서쪽 끄트머리 일부가 솟아오른 것이다.
그러므로 월출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이다. 거기에 얹혀사는 월출산의 흙은, 풍화의 결과로 생성되어 바위의 틈새를 메워 주는 접착제에 불과하다. 평탄한 지형 위에 마치 섬처럼 솟아 있는 그러한 고립 구릉 암체를 지질학에서는 인젤버그(Inselberg)라 한다. 그보다 규모는 작지만, 산기슭 민간의 안마당이나 들판 복판에 게으른 황소처럼 졸고 있는 집채만한 바위들이 모두 ‘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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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구석구석 달이 잘 보이지도 않을 고을에도 달 월 자 돌림이 붙어 다니는 것을 보면, 대체로 산이름이 먼저였고 그것에 따라 작은 동네 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알타이 조어나 고구려어에 ‘달’은 ‘높다’ 혹은 ‘산’의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돌’과 그 어원이 같아고 하겠다. #달 #높다 #돌 #월출산
덕진차밭은 바다였다! 덕진포
광주-나주-영암- 목포를 지나면서 만나는 #영산강 월출산 주변까지 배들이 드나 들었다고 한다. 월출산 서쪽, 도갑사를 지나서 만나게 되는 구림마을 뒷산에는 왕인박사의 유적지가 있고, 왕인박사는 구림 인근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간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월출산 북쪽의 덕진은 현재 월출산의 아침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덕진차밭이 위치한 곳이지만 과거 덕진포가 있었던 포구였다. 전체적으로 영산강 하류는 1900년대 이전의 조선시대 간척사업을 시작으로 조금씩 변화 하였고 1980년대 이후 대규모 간척사업 이후로 과거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 덕진의 어원은 전라도 사투리로 ‘독진’ 즉 ‘독(돌)나루’가 된다. 독나루의 한자화는 두 가지의 예가 있는데 石津(석진) 또는 德津(덕진)으로 표기된다. 덕진포는 그 옛날 돌다리가 있던 포구가 있었던 곳이다 (변남주, 2012). 동틀녘 덕진포구에서 바라보던 월출산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신비는 상상속에 남기고 가끔씩 꺼내보기로 한다. ‘월출산 주변까지 과거에는 배가 들어왔다’ 하여 궁금 하였고, 이에 변남주(2012), 영산강 뱃길과 포구연구, 민속원 을 주문하여 알고 싶었던 내용을 찾아 보았다. (2022/03/03)
구림마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된 마을
“계조직으로 출발하였다가 뒤에 향약계로 발전한 것으로 전라남도 영암군 구림리(鳩林里)의 대동계(大同契)가 있다. 이 대동계는 1565년(명종 20)에 조직, 실시되었으며, 왜란 직후인 1609년(광해군 1)에 향약계로 발전, 복구되어 현재까지 실시되고 있는 계회 조직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향약계(鄕約契))
2006년에 출간된 “호남명촌 구림 : 구림사람들이 손수 쓴 마을 공동체이야기 : 비둘기 숲에 깃든 공동체, 구림지편찬위원회 지음, 리북”은 536쪽에 이르는 구림 마을 공동체의 기록이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
책의 내용 중에 일부 –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 그리고 현재(2005년) 구림 사람들의 직업현황과 마을별 자동차 보유현황(2004년 농협통계). “구림 최초의 자동차는 1960년경 서호정, 박석훈-조재성 공동 소유한 차량번호 전남872의 화물 자동차였으며, 1965년 경 조인환 소유의 정미공장에서 벼 수집과 쌀 반출용으로 차량번호 전남 2067과 전남 5022의 화물차 두대를 운영하였다”
구림마을을 산책하면 여기는 무엇하는 곳인가 궁금하게 생각되는 군립하정웅미술관도 구림마을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임을 알려준다.
영암 최고의 에어비앤비: 안용당(낭서고택)
영암 숙소는 안용당이다. 오전엔 각자 개인 일정을 보내는 것으로 계획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월출산에 갔으나 비도 오고 안개도 낀 것은 별일이 아니지만 2년전 월출산 산행 때보다 10킬로그램 이상 불어난 몸을 가지고 움직이기 너무 힘들어 천황봉만 갔다가 내려왔다. 1시 다시 안용당 도착. #점심은뭘먹어볼까
독천식당 휴일이라 청하식당에서 갈낙탕 점심, 강진읍내에서 커피, 주작산 산책, 무위사 화장실, 강진 설록다원에서 카톡 프사용 사진 촬영, 영암 삼호 한마음회관에서 고등학교 동기 (박주현) 픽업해서 목포에서 저녁식사 대접 받음, 늦어서 걱정한다는 낭서고택(안용당) 어머님 전화 받고 숙소로 컴백홈 #2일차같은3일차끝 (2020/08/05)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국보 144호
무위사 극락보전(국보13호),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313호), 도갑사 해탈문(국보50호),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144호)
구정봉으로 가는 길은 바위 틈 좁은 길 하나 밖에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에 이 구정봉에 대한 설명이 아래와 같이 나온다. 당연히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70
월출산(月出山)은 【일명 월내악(月柰岳)이라 한다. 】 영암(靈岩)에 있는데, 바위 봉우리가 층층이 치솟아 섰고, 그 가장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높이가 두 길이 넘으며, 곁에 한 구멍이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하며, 그 구멍을 따라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만하고,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패어서 물이 담기기를 동이같이 된 것이 아홉이므로, 구정봉(九井峯)이라 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속설에 전하기를, “아홉 용[九龍]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움직이는 돌이 있는데, 홀로 층바위 위에 서서 높이가 한 길이 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며, 서쪽으로는 산골에 연하고, 동쪽으로는 밑없는 구렁에 임하였는데, 한 사람이 흔들면 무너질 듯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하며, 이 같은 바위가 또 둘이 있었다.
지역의 선택과 지속가능성: 서광목장 그리고 월출산관광호텔
기업에서 운영하던 서광목장 이 있던 곳은 월출산을 마주보고 있는 활성산에 있었는데, 목장은 없어졌어도 목초지와 풍력발전소가 있는 자리여서 남도의 알프스라 불리기도 하고, 일출과 일몰의 명소로 관광객들과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제 그 자리에 가면 녹색의 초원이 새까맣게 변해있다. 목초지 전체를 검은색 블랙홀처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태양광 패널이다. 사업을 추진한 사람들, 사업을 통해 지역의 발전을 기대했던 지역주민들, 우리가 조금 희생해서 후손들에게 좋은 기회가 마련될 것을 기대한 부모님들은 지금 행복할까? 왜 저리 개발 했을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영암에 가면 가끔씩 들러서 목욕도 하고 숙박도 하던 월출산관광호텔도 코로나 여파를 넘어서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인근에 같은 모습으로 지어진 수 많은 한옥팬션들은 계속 무사할까? 배고파서 먹어서 그랬을까? 먹었던 짜장면 중에 가장 맛있었던 군서면의 짜짜루 (여는시간도 닫는 시간도 잘 알 수 없는)는 계속 열어 놓을까? 아래 사진은 영암읍내 영빈관 육낙(육회+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