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59년 11월 22일, 동아일보, 3면
學界서 表彰한 婦德 21日 韓國生物科學協會서 授與 피눈물 나는 看護 13年 死境에 이른 夫君 드디어 蘇生 子女 거느리고 行商으로 生計 主人公은 多足類動物硏究의 權威者인 白甲鏞敎授의 夫人 金德生女史…..
학계서 표창한 부덕
피눈물 나는 간호 13년
사경에 이른 부군 드디어 소생
20일 상오 10시 부터 서울 시내 성균관 대학교 학생관에서는 [한국생물과학협의회 제3회총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는 학자도 사회명사도 아닌 평범한 가정주부가 표창을 받았다. 생물학자인 남편이 결핵으로 몸져 누운지 13년 동안 어린것을 등에 업고 방물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남편의 간호에 눈물어린 장성을 기울였고 끝내는 남편을 다시 건강한 사람으로 갱생시킨 주부의 그 공덕을 높이 찬양하여 동협회로써는 처음으로 표창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여인의 이름은 올해 마흔네살인 김덕생 여사이며 이 부인의 남편은 지금 대구경북대학교 생물학교수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거미]. [지네]. 등 다족류 동물연구에 제 1인자라고 일컬어지는 백갑용(45)씨 그 사람이다. 남편 백씨는 재작년 9월에 똥오줌을 받아내던 13년간의 병상에서 소생하여 다시 건강한 몸으로 연구생활을 계속하고 있지만 만일 김여사의 초 헌신적인 공이 없었던들 아마도 다시는 우리나라의 저명한 학자 한사람을 건져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이날 학자들의 모임인 동협회에서 김여사를 표창한 연유인 것이다. 이제 김여사가 남편과 가정을 위해 바친 10여 성상의 역사를 펼쳐보기로 한다.
경북 영덕 출생이며 대구에 있는 경북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김여사가 백씨와 결혼한 것은 스물네살때 – 대구 출신인 남편 백씨는 그때 일본 宮崎 고등농업학교 1학년생인 스물여섯살의청년이었다. 지금부터 20여년전 당시의 결혼연령으로 보면 두사람은 노총각. 노처녀지만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친정인 영덕에 있던 김여사는 국민학교 교사발령까지 받았으나 완고한 부친의 반대로 그냥 집에서 지냈으며, 백씨는 대구고보 4학년도 [스트라이크] 사건에 관련되어 약 4년간이나 집에서 허송세월 하였기 때문이다.
결혼 후 宮崎 고농을 졸업한 백씨는 당시 일본에서도 생물학계에서 상당히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대원농업연구소]에서약 1년간 연구 생활을 하였다. 백씨가 연구소에서 있을때는 따로 국내에서 머물러 있던 김여사도 일본으로 가서 생활하였다.약 6년간의 일본 생활에 이어 그들이 귀국한 것은 소위 [대동아전쟁]이 발발하기 두달전 – 귀국 즉시 백씨는 서울 배재중학교와 대구남산여고서약 3년간 생물학교편을 잡았다. 결혼후 아무런 거리껌없이 탄탄하였던 그들에게 예고없이 결정적인 불행이 닥쳤다.
해방후 백씨가 대구농대 교수로 1년 남짓하게 근무하였을 때였다. 이때 [폐결핵]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백씨는 이 해 동짓달에는 완전히 운신조차 못하는 폐인이 되었고 이럴수록 환자의 마음은 더욱 병치료에 조급하여졌다. 백씨는 자기발로 도립병원으로 찾아가 의사의 지시대로 당시에는 새로운 요법이라던 기흉요법치료를 받았다. 그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실신상태가 되어 버렸다. 치료가 서툴러서 폐에 공기를 잘 못 불어넣어 공기가 피하로 새었기 때문에 가슴작의 부피가 모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지경을 당하게 된 김여사는 급작스런 남편의 위독에 어찌할바를 몰랐다. 그날부터 남편은 대소변을 받아내야하는 중태에 빠졌다. 병든이 집안에는 병을 막아낼 아무런 근력도 없었다. 이미 그때는 지금 스무살인 장녀와 열여덟살인 장남이 아무런 철도 없이 엄마에게만 보챌때이고 또 여사의 몸에는 지금 열세살인 2녀가 뱃속에서 김여사를 괴롭히고 있을 때였다. 남편의 병에 고민하고 어린것들에게 시달리기만한 김여사로서는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슨 방법으로라도 남편을 다시 일으키고 어린것들을 길러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김여사에게는 돈이 뼈져리게 필요한 것이다.
김여사가 맨처음에 [참기름]장사를 하여 보았다. 참기름을 짜가지고는 이웃이나 동창생 친구들 집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다시피 했다. 기름통을 머리에 이고 어린것을 가슴에 안고 또 등에 업고.
“아는 집에서 나올때는 정말 뒤꼭지가 부끄러웠습니다. 첫날 집에 돌아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옛날을 회상하는 김여사의 표정은 오늘의 영광도 잃은 듯 표정이 무거워졌다. 기름장사 4년 – 청춘의 홍안에 주름살 마저 깊어졌다.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양할 수 없는 김여사였다. 책장사도 하였고 [메리야스]장사도 하여 보아야 하였다. 이동안 김여사는 남편의 [깨죽]과 [생선반찬]은 하루도 거른일이 없으며 남편이 다시 일어날때까지 13년간 매일 남편의 주사를 손수 놓았다. 삭풍 몰아치는 겨울, 남편에게 깨죽을 대접하기 위하여 맷돌을 만지기에 손이 얼어붙어 지금도 김여사의 손가락은 가락마다 동상의 자국이 의연 하였다. 이렇게 남편을 지켜온 것이 13년. 김여사의 지성이 헛되지 않아 남편의 병도 재작년 9월로써 완전히 막을 내렸다. 남편은 다시 옛시절과 같이 건강을 찾고야 말았다.
21일 저녁 그의 오빠이며 전 농림부 차관인 김승윤씨 댁으로 김여사부처를 찾아간 기자에게 김여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도운다”는 그의 십년을 말하였다. 이날 연약한 아내의 손으로 자신의 육체를 찾은 백교수는 아내에 대한 엄숙한 경의를 바치는 것도 값았다. 김여사는 표창장과 남편의 동료 그리고 그의 여학교 동창들이 보낸 기념품을 앞에 놓고 남편과 같이 번갈아 바라보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언제나 굳세게 살아야겠다”는 이 말 한마디가 그들 부부와 아이들까지도 가슴에 새긴 가풍이기도 한거란 것이다. (동아일보, 3면, 1959년 11월 22일)
2.나의 할머니 김덕생 여사
할머니가 주인공인 사진은 할아버지가 찍으신 것이고 장소는 현재의 대구 동촌 근처. 하단 우측 사진은 영덕 천전리 출신인 할머니 본가 근처의 뒷산. 하단 중간: 1939년에 결혼식을 올린 할아버지, 할머니의 오래된 사진첩 앞에는 할아버지의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다. Once, and only once, and for one only 번역하면 한번, 단 한번,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정치인 김종필이 1951년 무렵 결혼할 때 부인에게 적어준 글도 이것이라고 하니,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나름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당신들 결혼 이후 부터 1950년대 까지 가족들 (아버지, 고모, 삼촌) 사진을 같이 모아 놓은 사진첩 맨 뒤에는 1939년 결혼식, 1940년 희자 출생 (큰고모)…1955년 의인(아버지) 경북중학교에 입학. 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대소사를 적어 놓았다. 다른 부분은 할아버지 글자인데, 자세히 보니 1949년(4282) 의인 수창국민학교입학, 제일과학교재사경북지사, 1950년(4283) 3월29일 차남 의현 출생(경인년) (음력 2월11일 오후 11시15분) 은 우리 할머니(김덕생)가 쓰신 글씨다.
3.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경북여자고등학교 전신) 졸업장, 상장, 통신부.
경북 영덕의 양반집 규수로 자라 신식교육을 받은 할머니는 글도 잘 쓰고, 말도 잘 하고, 붓글씨도 잘 쓰셨다. 당시 여성으로선 신장도 작지 않아서 농구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4.내 할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뜻하지 않은 사고의 후유증으로 말년에는 치매로 고생한 할머니가 가끔 집안 안방에서 ‘아이고 집에 가자! 집에 가자!’ 하시던 기억이 있었는데 한참 후에 생각해 보니 당신이 나서 자란 그 집을 말씀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1987년이니, 30년이 지난 2017년 1월 21일, 일본에서 온 엽서에 적힌 주소 ‘영덕 천전동’ 그리고 할머니 오빠가 농림부 고위관료였다는 작은 실마리만 가지고 할머니 고향집을 찾아 갔다. 지도를 검색하니 천전리가 있었다. 천전리를 가니 정말 마을 앞에 내(川)가 흐르고 있고, 영덕 본가의 뒷산 대나무, 세죽을 그리워 했던 할머니 말씀 처럼 나즈막한 산에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진 곳이 있었다. 천전리 마을 어귀에서 만난 어르신에게 용건을 말씀 드렸더니 마을회관에 가보라 하셨다. 쉼호흡 한번 하고 들어간 천천리 마을회관에 누워 계시던 남자 어르신 한분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우리 할머니 본가를 알고 있다. 그 오빠가 농림부 차관이라는 것도 정확하게 아신다.
지금 현재 살고 계신 분들은 할머니의 일가분들은 아니지만 찾아온 내력을 설명 드리니 마음껏 둘러 보라 하셨다. 우물도 옛날 그 자리, 집도 외부만 바뀌었지만 옛날 그대로라 했다. 그래! ‘집에 가자!’ 했던 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세죽(대나무)을 좋아했던 할머니 마음도 헤아려 보았다. 2017년 여름에 한번 더 찾아갔다. 대나무를 좀 가져가서 서야동에 심어 볼까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대나무는 1년 지나서 칠곡 동명에 있는 친구집에서 얻어와서 서야동에 심었다)
4.학회 표창에 관한 서신들
서울대학교 동물학교실에 강영선 교수님께서 13년만에 생물학자 남편을 살린 부인에게 학회에서 표창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알리는 1959년 10월 10일자 편지글. 신문에 나온 표창 받은 내용을 보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편지를 보낸 부산 친척의 편지, 병간호와 관련하여 할머니(할아버지)에게 11월30일까지 원고 청탁을 부탁하는 원고청탁서(세계일보사 1959년 11월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