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ve-dokyoon-kim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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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균의 음악여정 @김도균 그룹 앨범 <정중동> 라이너 노트
초등학교때부터 영어 가정 교사 곁에서 능숙한 영어 회화가 가능했던 김도균은 종교, 철학, 물리, 역사, 우주 등에 폭넓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은 천체 물리학자였다고 한다. 중, 때부터 전기 기타와 바이올린을 배웠던 김도균은 획일적인 제도권 교육이 싫었다. 똑같은 기계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가 싫어 고등학교 1학년을 마지막으로 기타에 인생을 걸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을 듣고 학교가 아닌 산으로 올라가서 교과서가 아닌 기타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
1985년 그룹 솔로몬에서 활동하던 시절 유현상(보컬), 김주현(베이스), 한춘근(드럼)과 함께 백두산을 결성해서 이듬해 데뷔 앨범 [Too Far! Too Loud! Too Heavy!]를 발표했다. 백두산은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와 함께 한국의 헤비 메탈 음악의 르네상스를 견인했지만, 1987년 2집 [The Moon on the Baekdoo Mountain]을 발표한 후 해산했다.
김도균은 일찍부터 한국의 국악에 관심이 많았다. 백두산 시절부터 그의 기타 솔로에는 국악적인 멜로디 라인과 리듬 패턴이 종종 선보이고 있었다. 이런 국악을 향한 김도균의 도전은 첫 번째 솔로 앨범 [Center of the Universe]에서 공개되어, “국악과 서양의 록이 접목된 새로운 스타일이 시도된 역작”이라는 세인의 평가를 얻었다. 조악한 음질과 국악에 대한 미약한 이해로 김도균의 실험은 다소 가려진 감은 없지 않았으나, 그가 행했던 한국적인 록, 국악과 록의 접목은 우리나라 대중 음악계에 신선한 파문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989년, 김도균은 록, 헤비 메탈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영국 출신의 뮤지션들과 함께 ‘사랑’이라는 그룹을 결성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시나위 출신의 보컬리스트 임재범, 솔로몬, 시나위, 카리스마를 거쳤던 베이시스트 김영진, 솔로몬 출신의 드러머 유상원과 함께 한국 헤비 메탈 음악의 드림팀이라고 불렸던 ‘아시아나’를 결성했다. 일본의 헤비 메탈 밴드 ‘Loudness’와 조인트 공연을 하고, 국내 최초로 영국에서 레코딩한 [Out on the Street]가 발표되었다. 김도균은 단 한 장 뿐인 아시아나의 앨범에서도 특유의 ‘가야금 주법’을 과시했으나, 이 화려한 함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92년에는 유현상이 탈퇴한 백두산을 재결성, 리더로서 백두산 3집을 발표했다. 자신의 사인 끝에 언제나 ‘Keeping Rock’을 새기는 김도균은 1989년 [Rock in Korea], [Power Together]와 같은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해서 록의 부활을 시도하지만, 댄스 음악과 힙 합으로 무장된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뚫지 못했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김도균은 1992년 이후 CCM 음악 활동을 하며, CCM 프로젝트 앨범 [빛으로 모두 함께] 참여, 1997년 미국 최고의 크리스찬 록 밴드 ‘Petra’의 내한 공연에 스페셜 게스트로 참가하기도 했다.
1995년부터 MBC TV 국악 프로그램 [샘이 깊은 물]에 고정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아직도 그의 국악과 록을 결합하고자 하는 학문적인 연구가 식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1997년에는 한대수의 후쿠오카 라이브 밴드로 참가하면서, 한대수-이우창과의 음악적 공조를 이어왔다. 1999년에는 그동안 홀로 심취했던 국악-록의 연구에 다양한 록 밴드 활동을 해왔던 후배 베이시스트 배찬우, 드러머 박동식과 함께 오늘의 김도균 그룹을 결성하며, 상호보완의 관계에서 음악적 진일보를 기했다. 2001년 한대수 [The Last Concert]에서 김도균 그룹의 세 명의 멤버는 기타-베이스-드럼으로 공연의 중추를 담당했고, 2002년 6월 서울 독립 예술제와 10월에 있었던 Musicscape Euro Andes Korean Music Festival에 참가하면서 대중들의 검증을 받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2002년 9월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기타리스트들이 한데 모인 프로젝트 앨범 [기타 제우스]에서 타이틀 곡 ‘Occupants’를 연주했으며, Kbs와 국악 중심이 공동 기획한 앨범 [아리랑] 참여했다. 그리고 김도균 그룹이 4년 동안 대외적인 활동을 유보한 채 오직 연구에만 전념했던 국악-록의 해법이 2002년 11월 [정중동(靜中動, Movement on Silence]이라는 타이틀로 발표하며, 좁은 한국이 아닌 넓은 세계 시장으로 우리 음악을 전파하기 위한 첫 걸음을 옮겼다.

외할아버지 김정태, 외할머니 이우순, 해수욕장, 대구 용천풀장, 서울 신용산 한강아파트, 은아, 상규, 종규 그리고 아지야, 영국에서 그룹사운드 Sarang을 결성하여 활동할 시절 누나(나의 모친)에게 보낸 편지

김도균의 2008년 그룹 백두산 재결성에 즈음한 김도균의 인터뷰

“미국, 영국, 일본에서는 록 뮤지션이 그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랩과 아이들그룹만 있는 비정상적인 구조였다고 할 수 있죠. 사회적으로 은행, 동사무소 등이 꼭 필요하듯 대중음악계에도 록 음악만큼은 존재해야죠. 최근 한국에서는 록 뮤지션이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블루칩 대형주가 뜨면 대세가 상승하듯 (백두산 재결성을 계기로) 한국에서 헤비메탈이 대세상승기를 탈 것입니다.(김도균)”

사회복지전공으로 사회경제개발(지역사회개발, 빈곤퇴치, 국제개발)분야를 전공한다고 하니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난 다음, 아지야는 간명하지만 명쾌하게 이야기 했다. 종규는 “찰스 황태자와 관심사가 비슷하구나.” 90년대 후반, 한대수 선생 때문에 뉴옄에 온 외삼촌을 맨하튼 언저리에서 만났다. 우주의 중심! 뉴욕이 바로 The center of the universe 라는 말에는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아티스트 아지야에 대한 경외심 마저 들었다. 족보를 따져 보면 아지야와 나는 대구시 남구 봉덕동 미8군 후문에서 갈고 닦은 영어인데, 그날 영어는 아지야가 다했고, 우리말로는 그렇게 더듬는 양반이 영어로 할때에는 그렇지 않아서 참 신기했다.

2005.09.26. Monday
아지야는 아일랜드 여자친구가 직장을 옮겨서 조만간 영국에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었다. ‘그의’ 인생은 과연 나의 말대로 ‘멋진 인생’ 인가 아니면 어른들의 말씀대로 ‘낙오된것’ 인가. 굳이 이 문제에 대해 조목조목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나는 호주 자형에 이어 이번에는 아일랜드 외숙모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흥미와 호기심 섞인 관심사를 가지고 있고. 한국적인 것은 세계적인것이고. 세계적인것은 한국적이다라는 이야기가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지야를 통해 잘 배우고 있다. ‘뉴욕’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이라고 했을때 아지야의 스케일이 글로벌을 넘어서서 유니버셜 한것임을 알아야 했다. ‘세계와 나’를 넘어서 ‘하느님과 나’를 생각할때 그것은 반드시 유니버셜한것이 되어야 함을 그때는 왜 몰랐던고…..그래서 우리는 항상 남의 인생에서 배운다. 교훈이 아니라 열정을.